지금

지금 나는 22살, 아주 조금 있으면 23살이 돼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 나이에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할아버지는 생산대 마을 사람들과 큰솥밥을 같이 먹으며 철강 생산량으로 영국·미국을 따라잡으려고 솥을 부숴 철을 만들고 계셨을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와 사귀고 계셨겠죠. 그로부터 1년여 뒤에 아버지가 태어나셨고요. 아버지가 23살이었을 때는 이미 개혁개방이 한참 진행된 뒤라 사회 곳곳이 들썩였고 사람들도 사방으로 오갔어요. 아버지는 열여섯, 열일곱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을 목수를 따라 목수가 되어 여기저기 남의 집을 고쳐 주셨대요. 그러다 할아버지와 크게 다투고는 윈난으로 가서 상산하향 하며 목수 일을 하셨는데, 이유는 당시 할아버지가 다른 마을 여자와 사귀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뒤 아버지는 윈난에서 구이저우로 옮겨 가셨고, 지금도 구이저우 먀오족 마을 사람들과 술 마신 얘기를 자주 하세요. 먀오족은 원래 술을 호탕하게 마시는데, 존경을 표하려고 밤부터 새벽까지 마셨고 쌀술을 한 독 또 한 독 비웠대요. 결국 아버지가 먀오족 주인집 사람들을 전부 곯아떨어지게 만들었고, 그분들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게 됐다는데,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게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술자리였겠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가장 빛나던 이야기를 자랑하고 싶어 하니까요. 윈난 이야기는 거의 안 하시는데, 예전에 내가 쿤밍에 갔을 때만 쿤밍의 몇몇 지명을 알려 주셨어요. 이를테면 이공대학 근처 같은 곳이요. 나는 거기에 가 봤고, 아버지가 그 시절 걸어 다녔을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분이었어요. 그 뒤 아버지는 쓰촨으로 돌아오셨고, 마을 사람의 소개로 맞선을 봐서 어머니를 만나셨고, 그다음에 내가 태어났고요.

그런데 나는 아직 23살이 안 됐어요. 그래서 22살인 나는 지금 출근을 하고 있어요. 이 나이 사람은 반드시 출근해야 하죠.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하지만 나는 이제 출근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진심이에요. 만약 누가 출근하는 걸 좋아한다고 자랑한다면, 우리 역시 그 사람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어떤 일을 좋아하는 것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좀처럼 둘 다 이루기 어려워요. 우리는 최대한 싫지 않은 일을 고르죠. 며칠 있으면 나는 사직하고 청두(Chengdu)로 돌아가요. 청두가 싫지 않으니까요. 돌아가서 뭘 하냐고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늘 자기한테 두 갈래 길을 정해 놓고, 선택의 순간이 오면 자기가 또 “인생의 십자로”에 섰다고 해요. 마치 한쪽은 지옥, 한쪽은 천국이고, 조금만 실수하면 만회할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요.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애써요. 그래서 늘 분수를 지키며 살아요. 훔치지도, 빼앗지도, 마약을 팔지도 않으니, 새까만 총구가 내 머리를 겨눌 일은 없겠죠. 그런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십자로”란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선택지가 많아요. 싫어하는 광고 일을 계속할 수도 있고(광고는 디자인이 아니에요. 그저 고객에게 값싼 상품을 제공하고, 고객이 만족하면 그만이죠.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주도해서 일련의 안을 고객의 제품에 적용하는 것이어야 하는데요), 업종을 바꿔 인테리어 디자인을 할 수도 있고, 웹사이트 디자인과 개발을 해 볼 생각도 있어요. 뒤의 두 가지는 아직 접해 보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그걸 해낼 능력이 있다고 믿어요. 오로지 끈기와 흥미만 있으면 되니까요.

지금 나는 광고 회사에 있어요. 인턴 옆에 앉아 그를 지도하고 있죠. 역시 갓 나온 대학생은 아무것도 모르네요. 나도 그때 그랬는데. 그러다 사회가 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떠올랐어요. 그 아저씨 아줌마들은 우리에게 경력이 없다고 깔볼 수는 있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를 배척해서는 절대 안 돼요.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럼 얼마나 아쉽겠어요.

(일이 너무 심심해서, 이 글은 전부 휴대폰 클라이언트로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