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해지는 법

작년에 책 두 상자를 택배로 집에 보냈는데, 겉박스가 다 찌그러진 채로 정리도 안 하고 구석에 대충 던져놨어요. 나중에 엄마가 도저히 못 보겠다 싶었는지 몰래 치워주셨는데, 저는 그 일에 신경도 안 쓰고 있어서 어디 있는지도 몰랐죠. 그 뒤로 반년 넘게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다 보니, 내가 책을 대체 몇 권이나 갖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그러다 지난달에 동료한테 피터 헤슬러(Peter Hessler)의 책 두 권을 빌려주면서 겸사겸사 대화 소재도 좀 만들고 혁명적 우정을 발전시켜볼까 했는데, 집에 돌아가서 큰 상자 하나를 샅샅이 뒤져도 책이 안 보이는 거예요. 혹시 잃어버렸나 싶어서 의아했죠. 결국 그 혁명적 우정은 발전되지 못한 채, 마르케스(Márquez) 소설 한 권이랑 인도 여행기 한 권만 빌려줬어요.

아빠가 차를 좋아하셔서 집에 온갖 종류의 차가 있어요. 마침 저도 차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차를 사 본 적은 없고 그냥 집에 있는 차를 이것저것 다 마셔봤어요. 묵은 보이차에서 곰팡이 낀 한약 냄새를 느낀 뒤로는 안시(Anxi)의 철관음으로 바꿨고, 철관음에서도 은은한 쓴맛이 느껴질 즈음 냉장고 냉장실에서 어메이산(Éméi Shān) 은침차 한 봉지를 발견했어요. 손으로 만져보니 건조하고 차가워서 좋은 차인 것 같아, 얼른 한 잔 우려서 컴퓨터 책상 옆에 놓아뒀죠. 마침 그날은 물컵이 거기 있는 걸 깜빡하고 있다가, 실수로 차를 컴퓨터 책상 옆 잡동사니가 쌓인 상자 위에 쏟아버렸어요. 얼른 치우는데, 웬걸, 이 상자 안에도 책이 꽤 많이 들어 있는 거예요! 다행히 젖지는 않았고, 게다가 《차이나 로드》와 《강청》도 거기 있었어요! 세상에, 엄마가 상자 두 개에다 제 책을 나눠 담아둘 줄이야. 이 상자도 잡동사니인 줄 알았는데요!

그 책들을 꺼내서 한 줄로 세워놓으니, 오래도록 마음속에 맴돌던 상실감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이 상자 안에는 사회학, 역사, 금융, 디자인, 컴퓨터 프로그래밍 책이 있었고 고전 문학도 몇 권 있었어요. 다 못 읽은 소설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 스스로도 참 가지각색이라고 느꼈어요. 이 책 더미만 보고 누가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때 문득 하나의 결론이 떠올랐어요. 제가 오랫동안 남들이 영문을 모를 행동을 해온 것과 관련해서요. 예를 들면 오늘은 제가 끙끙대며 포토샵을 만지고 있는가 하면, 내일은 밥 먹는 것도 잊고 코드를 고치고 있고, 모레는 열심히 단어를 외우고 있고, 글피에는 또 도서관에서 역사책을 빌려오는 거죠. 제 이런 이상한 행동의 근본 동기는 바로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였어요. 한 시간 전에는 다른 사람한테 태평천국 운동이 중국 역사 발전에 끼친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설명할 수 있고, 한 시간 후에는 HTML5에서 둥근 모서리 사각형을 구현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고, 그 다음엔 거시경제 흐름을 분석해줄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이런 지식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우는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을 산 거고요.

이상이라는 건 비극의 시작일지도 몰라요. 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걸 신경 쓰면 가장 나올 법한 결과는 아무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거예요. 오늘 오후에 저는 집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마음속으로 자꾸 공포가 밀려왔어요. 회사 웹페이지에 특집 페이지를 하나 추가해야 하고, 몇 달째 디자인만 하다가 끝내지 못한 개인 명함도 생각나고, 도장도 하나 새겨야 하고, 오늘 산 책 몇 권도 아직 안 읽었고,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더라고요! 그러다 한참 고민 끝에, 우선 오늘 산 책을 몇십 페이지 읽고,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전각에 쓰는 소전과 대전을 좀 공부한 다음, 나만의 도장을 새기기 시작했어요.

어떤 일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온 세상이 나와 상관없어져요. 도장을 새기는 과정에서 예전에 코드를 짤 때 느꼈던 그 감각을 다시 느꼈어요.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고 오직 이것에만 집중해서 완벽을 추구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마음이 들떠 있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차분함이야말로 박학해지는 법이라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