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외할머니가 늙은 황력을 읽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무척 의아했어요. 나이 든 여자분들은 다 우리 친할머니처럼 글을 모르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게 당연해져서, 마치 글을 아는 게 외할머니 타고난 재주인 양 여기게 됐고, 그래서 그 내력을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2018년 설에 외할머니 댁에서 단란하게 모였는데, 외할아버지가 예전 놋쇠 화로는 마을 사람이 200위안에 사 가서 골동품 장식품으로 두었다고, 올해는 새로 산 도금 화로로 모두를 대접한다고 하셨어요. 그건 외증조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거라 모두들 아쉬워했죠. 덕분에 그제야 어른들이 가족 옛이야기를 한두 마디씩 꺼내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외증조할아버지 댁에서 무척 묵직한 은젓가락으로 밥을 먹은 기억이 났는데, 왠지 내력이 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가족 이야기를 되살려 보기로 했어요. 먼저 외할머니 쪽부터 시작할게요. 이쪽 이야기가 더 풍성하거든요.
우리 외할머니 성은 서(서) 씨인데, 중화민국 시절(1930년대)에 서가는 충칭(Chongqing)에서 목재 사업을 했어요. 충칭은 수상 교통의 요충지라 20~30년대부터 도시 규모가 빠르게 커졌고, 한때 ’작은 상하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도시 건설에 목재가 대량으로 필요했으니 시대의 흐름이 서가를 크게 일으켜 세웠어요. 외할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외증조할머니는 충칭의 큰 집안 규수로 곱게 자라 호강하며 살았어요. 서가로 시집온 뒤에도 손만 뻗으면 옷이 오고 입만 열면 밥이 오는, 규수 티를 조금도 줄이지 않으셨대요. 집안 사업이 순조롭게 풀리자 의기양양한 외증조할아버지는 새 부인을 한 분 더 맞아들였는데, 참으로 체면이 섰다고 해요.
1938년 외할머니가 충칭에서 태어났어요. 그때 이미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외할머니의 출생이 집안에 그리 큰 기쁨을 주지는 못했어요. 그해 정부군이 패하면서 전화가 마침내 임시 수도까지 번졌고, 일본 폭격기가 며칠 걸러 한 번씩 충칭 상공을 빙 돌곤 했거든요. 포성이 연일 이어지니 집안 식구들은 늘 마음을 졸였어요.
전쟁은 그들이 바라던 대로 잦아들지 않았고, 몇 해가 지나도 전운은 그대로여서 승리의 기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어요. 장사하는 것도 칼날 위를 걷는 일이니 목숨부터 챙기는 게 순서였죠. 서가 사람들은 고향으로 피난 가기로 하고, 일부는 충칭에 남아 집안 재산을 지키기로 했어요. 외증조할머니의 부모는 딸이 서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만류했지만, 외증조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위해 함께 시골로 내려갔어요.
외증조할아버지의 귀향길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고 해요. 지금까지도 외할머니는 그 일을 잊지 못하세요. 1940년대, 법폐가 점점 가치를 잃어서 서가 같은 피난민에게는 계륵 같은 존재였어요. 재산을 최대한 몇 상자의 금은 경화로 바꿔 두긴 했지만, 그래도 실어 날라야 할 지폐가 산더미였거든요. 영감과 마님은 가마를 타고, 식구들은 은원과 재물을 짊어지고, 하인들은 등짐으로 지폐를 잔뜩 메고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외할머니 평생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이었다고 해요.
어린 외할머니가 가족과 함께 금의환향하던 그 무렵, 세 살 위인 외할아버지는 진흙투성이 논길을 걸으며 아버지를 따라 삼십 리 밖 작은 마을 젠싱(Jianxing)으로 가고 있었어요. 중화민국 시절의 젠싱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교통 요충지이자 사방 수십 리 안에서 가장 큰 장이 서는 곳이었는데,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외증조할아버지가 여기에 가게를 세 내어 철공소를 열고 쇠를 녹이고 구리를 녹여 놋쇠 화로, 무쇠 솥, 괭이, 쟁기 같은 도구를 만들었어요. 외할아버지는 그 여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몰랐고, 어쨌든 두 번 다녀온 뒤 집에 돌아와 다시 소를 먹였어요. 반면 외할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작은외할아버지는 아버지 곁에 남아 기술을 배웠고요.
서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넓은 땅을 사들여 순식간에 동네에서 이름난 큰 집안이 됐어요. 외증조할머니는 여전히 먹고사는 걱정 없이 지냈고, 우리 외할머니조차 몸 쓰는 일은커녕 곡식이 어떻게 나는지도 몰랐대요. 하지만 그런 형세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1949년 말 난충(Nanchong)이 해방되면서 서가의 좋은 시절도 끝났고, 이어서 지주 타도와 토지 분배를 겪으며 몰락했어요. 충칭에 남은 서가 사람들과는 고향과도 연락이 끊겼고요.
세상일이 바뀌어 외증조할아버지는 장의 가게를 닫고 철공소를 집에서 육 리 떨어진 작은 마을로 옮겼어요. 장사는 확 줄었지만 집에서 가까워졌으니 가족끼리 오순도순 지냈대요.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그러니까 막내외할아버지도 나중에 대장장이가 되어 기술로 점점 작은외할아버지를 앞질러 집안의 기둥이 됐어요. 1956년쯤 공사 합영으로 외증조할아버지의 철공소는 공유 재산이 되었고, 작은외할아버지와 막내외할아버지는 국영 철형 공장의 정식 직원이 됐어요.
서가의 몰락 덕분에 소 먹이던 총각이 규수와 혼인할 기회를 얻었어요. 외할머니의 혼수는 조각이 뚫린, 모양이 정교한 팔선탁자였는데 지금도 옛집에 놓여 있어요. 외증조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직접 두드려 만든 놋쇠 화로를 선물로 주셨고요. 외할아버지와 결혼한 뒤에야 외할머니는 조금씩 일을 배웠어요. 외할아버지는 집안의 거친 농사일을 모두 도맡아 평생 고생했고, 지금도 그러고 계세요.
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 서가의 증외할머니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도저히 못 드셔서 그대로 굶어 돌아가셨어요.
작은외할아버지는 정년을 기다리지 않고 아들에게 철형 공장 자리를 물려줬는데, 나중에 술을 심하게 마셔 정신이 이상해졌고 2016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아들은 금형 기술을 갖고 있어서 90년대 실직 후 광둥의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지금 월급은 약 1만 5천 위안이라고 해요. 막내외할아버지는 철형 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다녔고, 공장이 망한 뒤 그 자리에 몇 층짜리 작은 건물을 올려 연금을 받으며 편안히 노후를 보내고 계세요.
서가의 후손 중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인데, 지금 청두(Chengdu)에서 이발을 하고 있어요. 친동생이 단골인데 5위안만 받고, 다른 손님에게는 20위안을 받아요. 나는 좀 더 내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가는 횟수를 줄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