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역정과 같아요
그해에 저는 아마 다섯 살이었을 거예요. 제 흐릿한 기억은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그때 아버지는 아직 먼 곳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이미 광둥(Guangdong)에 가 계셨어요. 그 시절은 바로 외지 취업의 절정기였는데, 중서부 성의 많은 노동력이 동남 연해 성으로 대거 유출되던 때였죠. 제가 두 살이었을 때 외할머니 마을에서 광저우(Guangzhou)에서 돌아온 사람이 외지에서 돈을 벌기 쉽다고 말했고, 그래서 어머니도 같은 고향 사람들을 따라 같은 공장에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돈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려고, 어머니 월급은 모두 외할머니께 보내 맡기셨죠. 그때 기차도 지금처럼 편리하지 않아서, 고향에서 광둥으로 가려면 모두 충칭(Chongqing)에서부터 장정을 시작해야 했어요. 이틀 동안 밀폐된 화물열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충칭에서 아직 물이 차지 않은 장강 삼협을 지나는 유람선을 타고 후베이(Hubei)까지 간 다음 다시 기차를 타는 방법도 있었는데, 가는 길이 꽤나 고생스러웠어요. 그래서 외지에 나가 일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이미 삼 년째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다시 만나려면 이 년을 더 기다려야 했어요. 물론 그때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몰랐죠. 그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 알았어요.
제가 어머니가 돌아오시길 바라는 마음은 아주 순수했어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서 모성애의 결핍을 느낀 게 아니라, 저와 제 친구들은 모두 한 마을에서 방목처럼 자랐고 아무도 부모가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누가 부모가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제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엄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 장난감을 안 사다 주실 거라고 경고하셨어요. 이건 정말 두렵고 반박할 수도 없는 이유였죠. 그래서 그 시절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기본적으로 아주 말 잘 듣는 아이였어요. 진흙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외에는 닭을 훔치거나 오리를 죽이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아서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어요. 다른 친구들이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정벌하고 서쪽으로 약탈할 때마다, 그분들은 항상 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절한 평가를 내려주셨죠. “이 녀석은 손 하나 까딱 안 하는구먼!” 이 말은 참으로 고명했지만, 저는 “이 영감님 말씀도 참 듣기 좋네요!“라고 받아칠 수 없었어요. 그러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참고 넘어갔죠. 또 친구들이 마을에서 게릴라전을 벌일 때 전투 관찰자로서 저는 그들을 고자질하는 습관도 없어서 친구들 사이에서 업계의 양심이라 불렸어요.
제 아버지는 목수셨고, 주된 업무는 집을 고치고 가구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목수든, 대장장이든, 벽돌공이든, 석공이든, 이들을 통틀어 장인이라고 불렀어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손에 기술 한 가지라도 있으면 깨지지 않는 밥그릇을 가진 것과 같았죠. 비록 쇠그릇은 아니었지만, 굶어 죽지는 않았어요. 농한기에는 기술 일을 조금 하면 집에서 어린 모종이 자라는 걸 보는 것보다 나았죠. 마을의 젊은이들은 몇몇 고등학교나 중등전문학교에 합격한 우등생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모두 스승에게 배웠어요. 고등학교에 합격한 젊은이들도 농사일을 몇 년 덜 한다고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었어요. 80년대의 대학 진학률은 예전 과거 시험의 합격률과 비슷했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결국 장인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 직업은 바로 ’교사’였어요. 60~70년대의 교사는 심지어 석공보다 지위가 낮아서 직업 순위 꼴찌에서 두 번째였고, 마오쩌둥 주석조차 그들을 다정하게 ’냄새나는 아홉 번째 부류’라고 불렀어요. 다행히 꼴찌인 거지보다는 높았죠. 80년대에 교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어요. 지나치게 엄격한 대학 진학률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앞날이 애매해지자, 선견지명이 있는 젊은이들은 올바른 자세로 중등전문학교에 지원해 전문 기술을 배웠어요. 저희 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년 동안 시험을 봤지만 모두 낙방하고 스승에게 배우게 되셨죠. 전통 중국의 스승에게 기술을 배우는 방식은 제자들이 스승에게 학비를 내지 않고, 제자들이 스승의 일을 도와도 임금을 받지 않았어요. 배움을 마치는 날이 바로 출사하는 때였죠. 그 시절 아버지는 스승을 따라 고향 주변 곳곳에서 일했는데, 가장 멀리 간 곳은 펑시(Pengxi)였어요. 어느새 아버지는 23살이 되어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인연을 맺어주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장인이고 어머니는 재봉을 할 줄 아니 함께 살아가면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어머니는 그에게 시집가셨죠.